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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리뷰 쓰는 것도 정말 오랜만입니다. 스윙걸즈[매운맛나리] 이후로 처음이니 거의 9개월만이네요. 사실 이전에도 여러 번 얘기했던 것처럼 영화 리뷰는 '이곳저곳 좋은 리뷰 많은데 내가 뭐 대단한 소리 할 수 있다고 리뷰는 무슨 리뷰…'라는 생각이 먼저 들어서 항상 피하게 되는데, <판의 미로>는 간만에 여기저기에 영화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의욕이 넘칠 정도로 취향에 200% 맞는 영화였습니다. 게다가 이번에는 세간의 리뷰에서는 잘 다루지 않는 얘기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고 말이죠? 그럼 리뷰 스타트!합니다. |
| 피카소의 <게르니카> 프랑코파를 지지한 나치의 게르니카 폭격을 비난하는 의미로 그려진 그림입니다 | 예고편이나 포스터, 혹은 사진만 보신 분들이 상상하시는 것과 다르게, <판의 미로>는 그냥 판타지 영화가 아니라 1944년경 프랑코의 반란군과 민병대 사이에 벌어진 스페인 내전을 다루고 있는 정치색이 강한 영화입니다. 당시 내전은 2차 세계 대전의 그늘에 가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전장에서만 약 30만명이 죽고 테러와 보복으로 10만명, 기아로 인해서 63만명이 죽었던 참혹한 전쟁[joins.com]이었다고 합니다. 쉽게 상상할 수 있듯이, 이후 프랑코는 정권을 장악한 뒤 36년의 독재 기간동안 납치, 고문, 감금 등 온갖 불법 잔학 행위를 일삼았다고 하는데, 이런 어두운 근현대사를 주요 배경으로 다루고 있는 만큼 <해리포터> 시리즈나 <나니아 연대기> 같은 영화를 기대하고 가신다면 적잖이 당황하실 법도 합니다. |
| 이 한 장면만으로도 많은 사람 낚은 영화? | | 어떻든 이 <판의 미로는> 이런 정치색 짙은 배경과 잔혹한 묘사, 좌파 성향의 주제, 아름다운 배색, 판타지와 교차하며 진행되는 교묘한 플롯, 디테일한 미장센 등 어느 한 부분 제 취향에 맞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인 영화였는데요, 스페인 내전에 관련하어 비달 대령에 잔인한 독재자 프랑코를 빗대어 진행하는 정치색 강한 메인 플롯에 대해서는 여러 리뷰에서 많이 다루어진 듯 하니, 저는 오필리아와 메르세데스의 관계에서 진행되는 대선율을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풀어볼까 합니다. (뭐 그렇다고 제가 여성학 전공자도 아니니 넘 엄하게 읽지는 말아주시기 부탁 :$ ) |
이하 스포일러가 포함된 리뷰입니다▼ | 판타지 세계답지 않게 두렵고 거부감이 드는 퀘스트만이 오필리아에게 주어집니다 | <판의 미로>의 플롯 진행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판타지 요소로서 부각되는 오필리아의 세 가지 퀘스트입니다. 몇몇 리뷰에서는 오필리아가 두 번째 퀘스트를 진행하면서 아무런 이유 없이 그저 동화적 클리셰에 따라 금기를 깨뜨렸다, 그 결과 플롯이 상당히 단순해졌고 판타지적인 상상력이 부족하다는 인상을 준다고 지적하고 있는데, 저는 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 두 번째 퀘스트가 그렇게 진행되어야 하는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얘긴데요….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오필리아의 세 가지 퀘스트와 민병대 스파이로 정체를 감추고 살고 있는 메르세데스의 삶 사이의 의도적인 대칭성입니다. |
| 비달 대령의 비위를 맞추며 창고 열쇠를 얻어내는 메르세데스? | 첫번째 퀘스트에서 퇴치해야 할 대상인 두꺼비는 비달 대령을 빗댄 노골적인 은유입니다. 이 두꺼비는 오래된 나무(스페인의 은유일까요?) 아래서 살면서 벌레를 잡아먹고 나무를 말라죽이며 살고 있습니다. 메르세데스가 보급품이 전달되는 창고 열쇠를 민병대 동지들에게 몰래 빼돌린 것처럼 오필리아 역시 세 개의 돌을 먹여서 두번째 퀘스트에 필요한 열쇠를 두꺼비 뱃속에서 얻습니다. 이 퀘스트를 수행하는 나무 뿌리 아래는 비위에 거슬릴 정도로 지저분한데요, 이런 배경을 통해서 메스세데스가 비달 대령의 시중을 들며 느낀 굴욕감을 은유적으로 잘 전달하고 있습니다.(세 개의 돌이 갖는 의미는 한 번 보고서는 해석하기가 좀 어렵네요) |
| 비달 대령의 비위를 맞추며 창고 열쇠를 얻어내는 메르세데스? | | 두번째 퀘스트에서 오필리아는 '창백한 남자'의 식당에 가서 첫번째 퀘스트에서 얻은 열쇠로 칼을 가져오라는 임무를 부여받습니다. 이 과정에서 오필리아는 뭔가에 홀린 것처럼 '아무리 맛있어 보이는 것일지라도 절대 아무 것도 먹지 말라'는 금기를 어기고 포도알 두 송이를 따먹습니다. 그 결과 오필리아는 목숨의 위협을 받고 판이 동료로 데려가게 해 준 요정 둘이 '창백한 남자'에게 잡아먹히고 맙니다. |
| | | 이 퀘스트 역시 메르세데스가 민병대의 지도자인 애인에게 비달의 창고 열쇠를 전달해 준 뒤에 일어난 일과 정확히 대칭 구조를 이룹니다. 지금은 경비가 삼엄하니 때를 잘 고르라는 메르세데스의 충고를 듣지 않고 민병대가 양동 작전 후에 돌입하지만, 많은 수가 반란군에 의해서 진압당하고 맙니다. 이 과정에서 '창백한 남자'가 오필리아의 낌새를 채고 뒤쫓는 것처럼 비달이 메르세데스를 의심하게 되고, 말더듬이 동지와 의사, 정확히 두 명이 비달에게 살해당합니다. |
| '창백한 남자'의 모티브가 된 프란시스코 고야의 <새턴> (부분) | 그런데 세번째 퀘스트에 이르러서는 이 불안정한 대칭성이 깨지고 맙니다. 오필리아에게 비달의 갓 태어난 아들을 데려오라는 퀘스트가 주어지지만, 메르세데스에게는 비달의 아들에 대응하는 존재가 없기 때문이지요. 앞서 두 퀘스트가 현실과 격리된 판타지 세계에서만 이루어졌던 것에 반해, 판타지 세계와 현실의 간섭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점도 유의할 만한 부분입니다. 이 시점에서 비달 대령의 아들이 전체 플롯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지 짚어볼 필요가 생깁니다만, 그 전에 오필리아와 메르세데스 간의 관계를 좀 더 살펴보지요. |
| 두 사람이지만 한 사람, 오필리아와 메르세데스 | 오필리아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퀘스트 책을 살펴보는 것처럼 메르세데스 역시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도록 마루 바닥 돌 아래에서 편지를 꺼냅니다. 오필리아가 밤에 몰래 미궁으로 향하듯이 메르세데스도 밤에 몰래 민병대의 근거지로 향합니다. 무엇보다 오필리아는 대령과 결혼한 엄마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오직 메르세데스에게만 속마음을 털어놓습니다. 이쯤되면 이 둘은 두 사람이 아니라 정신적인 쌍둥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틀릴 가능성이 더 높아지지만 좀 더 대담하게 나가서 오필리아가 한 사람의 여성, 메르세데스 안에 존재하는 미성숙한 인격이라고 가정하면 어떨까요? |
| 가부장제의 화신, 비달 대령 | 여기서 제가 주목한 부분은 비달 대령의 아들에 대한 집착입니다. 임신한 부인을 산골로 불러오거나, 산모가 죽더라도 아들은 살리라고 주문하는 장면은 비달 대령의 잔혹성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라기엔 부자연스럽습니다. 그의 잔혹성은 토끼 사냥하던 부자를 죽이는 장면이나 생포한 민병대 고문 장면을 통해서 충분히 전달할 수 있었기 때문이죠. 임신한 아이가 아들이라고 확신하는 장면 역시 마찬가지로 메인 플롯 상에서 보자면 매끄럽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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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에 물드는 퀘스트 북, 상징하는 바가 뚜렷합니다 부득이하게 캡처샷입니다 (__) | 이렇게 몇몇 메인 플롯과 거리감이 있는 장면들에서 '비달 대령은 혹시 가부장제의 폭력성을 대변하는 인물이 아닐까'하는 의혹을 포착할 수 있다면, 펼친 퀘스트 북이 피로 물들고 오필리아가 '난 아이따위 낳지 않을 거야'라고 외치는 장면에서 이런 의혹은 확증으로 변합니다. 오필리아가 메르세데스의 미성숙한 인격이라는 가정 하에서 이 장면은 소녀가 갖는 첫 하혈에 대한 공포와, 여성을 대를 잇는 수단으로만 보는 가부장제에 대한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장면이란 얘기죠. |
| 만드라고라 역시 오필리아의 미성숙함을 드러내는 소재입니다 | 이런 관점에서 바라보면 비달 대령의 아이가 의미하는 바는 메인 플롯에서 의미하는 바와 상당히 달라집니다. 메인 플롯에서 아버지(비달 대령)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게 되는 아기는 독재 시대를 지나 태어나는 새로운 세대를 의미하지만, 가부장제에 대한 반감을 다루는 대선율에서는 가문을 이어가는 존재를 의미하게 됩니다. 또한 만드라고라 역시 남성 없이 아이를 만들고 싶다는 오필리아의 미성숙한 소망의 투영물이 되고, 아이를 판타지 세계로 데려가라는 세번째 퀘스트는 가부장제 시스템을 떠나서 아이를 키우고 싶다는 희망을 반영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
| 이 아이는 당신의 이름도 모르고 자랄 거예요 | 결과적으로 이런 관점에서 새로 태어난 아기를 향하는 오필리아의 칼과 대령의 입을 잘라놓은 메르세데스의 칼은 향하는 곳이 다르지만 가부장제라는 같은 대상을 향하고 있는 것이지요. 따라서 영화 종반부에서 대령의 아이를 받아든 메르세데스가 비달의 아이를 비달의 이름, 즉 부계 중심의 가문을 모른채로 키우겠다고 말하는 장면이, 제게는 가부장제 시스템에 대한 반격이자 모계 중심 사회의 복권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메르세데스 외에는 모두 남자라는 점이 이를 뒷받침해줍니다. 이 장면에서 민병대의 지도자 동지가 이 대사를 대신 말했다면 의미가 완전히 달라졌겠죠) |
| 역설적이기 때문에 슬프고 아름다운 엔딩 | 그런데 메르세데스는 내적으로 미성숙한 인격, 즉 오필리아를 갖고 있었는데 이 장면에서는 어느샌가 자연스럽게 어머니의 위치를 획득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급격한 전환이 가능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앞 장면에서 미성숙한 인격인 오필리아가 비달 대령에게 죽었기 때문입니다. 꿈은 꿈일 뿐이고 우리 모두는 결국 현실에 눈떠야만 한다는 사실을, 영화는 오필리아가 죽음에 이르러 보게 되는 아름다운 환상을 통해서 역설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미성숙한 오필리아라는 인격이 냉혹한 현실과의 접점에서 소멸됨으로 인해서 메르세데스는 한 명의 성숙한 여성이 되고, 새로운 어머니로 다시 태어나는 성장 드라마가 완결되는 것이지요. |
| <판의 미로>의 디자인에는 아서 랙컴경의 일러스트레이션이 많은 영감을 주었다고 합니다 | 어떤가요, 그럴싸한 해석으로 들리시나요? 그래주시면 저로써는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습니다만, 제가 보기에도 이 해석에는 구멍이 많이 있습니다. 가장 큰 빈틈은 비달의 부하에게 쫓기던 메르세데스가 민병대 지도자인 애인에게 구조되는 장면입니다. 이 장면은 '결국 여성은 남성에게 의존할 수 밖에 없는 게 아닌가'라는 메시지로 읽힐 수 있기 때문에 영화 전체를 여성주의 영화로 읽을 수 없도록 만드는 장면인데요, <판의 미로> 자체가 냉정한 현실을 그리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결국 아무리 강한 여성도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정도로 해석하는 것이 그나마 최선일 것 같네요.
어떻든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풀어놨더니 마음이 좀 가벼워졌습니다. :) 마무리는 아서 랙컴 경의 일러스트레이션으로 충분하겠죠? 아서 랙컴경은 1867년 경에 태어나 우울하면서도 아름다운 그림체로 요정과 트롤과 같은 환상 문학 소재로 일러스트레이션을 했던 작가로 유명합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존경하고 좋아하는 일러스트레이터이기도 한데, <판의 미로> 역시 이 작가에게 영감을 받았다고 하니 반갑고도 신기한 기분이네요. :) |
# by 매운맛나리 | 2006/12/08 20:44 | 웰빙 | 트랙백(2) | 덧글(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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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월요일 화요일은 천사의 유혹을 보는 날입니다. by 매운맛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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