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율전쟁
'펀드매니저가 쓴 금융테러소설'이라는 거창한 부제를 달고 있는 소설이다. 글쎄... 펀드매니저가 써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설득력있는 설명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설명은 묘한 설득력을 갖고 있었다'라는 식의 거친 서술이나 해킹, 암흑가 조직 등에 대한 개연성이 부족한 묘사, 우연과 음모론, 민족주의를 끌어들여 마무리 짓는 상투적인 구조는 소설로서 읽는 재미를 반감시킨다. 이런 단점을 금융 부문에 대한 설명이나 묘사가 보강해준다면 무난하게 읽는 보람이 있었을텐데, 불행히도 헤지 펀드 회사 LTCM, Long-Term Capital Management의 흥망성쇠를 다룬 천재들의 실패에 비교했을 때 그런 부분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것이 안타깝다.

책에서 다루고 있는 사건 자체는 관련된 손실의 충격적인 규모에 비해 비교적 단순하다. 요약하자면 97년 7월 경 국제 통화 위기를 불러온 바트화의 평가 절하는 한국의 투자 자본을 국제 투기 금융 세력이 긁어가기 위해서 조작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책 속에서 이런 음모의 주역을 담당한 투자 회사인 레이먼드 브러더즈는 80%라는 믿을 수 없는 수익율을 거의 아무런 위험 없이 보장한다고 하는 블루 다이아몬드 펀드라는 상품을 통해서 국내 금융 기관들에게 어마어마한 투자를 받은 뒤, 바트화 평가 절하에 의한 손실을 모조리 투자자에게 떠넘겨버린다. 과연 블루 다이아몬드는 어떤 상품이었길래 국내 투자 회사들이 이런 손실을 다 뒤집어 쓸 때까지 몰랐던 걸까?

책에서 설명하는 블루 다이아몬드의 구조는 간단하다. 펀드가 투자 받은 돈(1억 달러)을 담보로 달러화보다 금리가 낮은 엔화를 차입(1억 달러)하여 금리가 27% 정도인 인도네시아 채권에 투자(총 2억 달러)한다. 그런데 국제 금융 시장에서 엔화로 채권을 구매할 수 없고 달러를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펀드가 만기 시점에 달러 대비 엔화 환율이 내리기라도 하면 (즉 엔화 가치가 올라가기라도 하면) 차입한 엔화를 갚을 때 손해를 볼 수 있기 때문에 달러 대비 엔화의 낮은 금리로 인한 이점이 사라지게 된다.

소설 속의 레이먼드 브러더즈는 엔화의 환율 변동으로 인한 이런 위험을 헤지하기 위해서 바트화를 사용한다. 태국은 달러화와 엔화에 자국 통화 환율을 연동하는 통화 바스켓제를 운용하고 있는데, 이 제도로 인해서 엔화가 달러에 대해 움직일 때마다 바트화 역시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엔화 가치가 올라갈 경우를 대비해서 적절한 규모의 바트화를 매입해두면 엔화가 오를 때 바트화도 오를 것이므로 차입 시점과 만기 시점의 환율 차이로 인한 손해를 커버할 수 있게 된다. 반대로 엔화/바트화 가치가 떨어질 경우는 차입금을 갚을 때 그만큼 이득이 발생하므로 엔화 환율 변동으로 인한 위험을 커버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바트화가 엔화와 어떤 비율로 묶여 있는지를 알지 못하면 투자할 수가 없다.

여기서 레이먼드 브러더즈는 바트화의 달러 대 엔화 구성 비율이 8:1이라는 것을 모종의 방법으로 밝혀낸다. 즉 엔화가 8 움직이면 바트화가 1 움직인다는 의미다. 블루 다이아몬드 펀드는 엔화 차입 금액의 8배에 달하는 바트화를 선물 매입해서 리스크 헤지를 마무리짓는다. (선물 매입으로 인해 만기 시점에 현재 환율로 바트화를 구매할 수 있으므로, 엔화/바트화 가치가 오르면 싼 값에 바트화를 산 셈이 되므로 선물 매입에서 이득을 보고 차입금에서 손해를 보게 되는 셈이다) 이 때 선물을 매입하면 선물 대신 바로 바트화를 들고 있을 때의 금리 13%와 달러를 들고 있을 때의 금리 7%의 차이인 6%를 프리미엄으로 받게 되므로, 엔화 차입 비율인 8배를 곱해서 48%의 추가 수익이 발생하게 된다. 최초의 인도네시아 채권에서 발생한 24% 이득과 바트화 선물로 인한 48% 이득에 원화 선물 매입으로 인한 6% 이득을 합치면 수익률 80%의 구조가 완성된다.

실제로 90년대 중반 미국의 투자 은행인 JP 모건은 4% 정도의 금리인 달러와 엔화를 조달하여 금리 12%인 태국 국채에 투자하여 8% 정도의 차익을 내고 있었다. 그런데 이 투자 규모가 너무 컸기 때문에 (약 10억 달러) 태국 경제가 흔들리기 시작하자 바트화 폭락에 대비하여 TRS, Total Return Swap란 파생 상품을 만들어냈고, 96년 가을 한국에서 이 상품을 신나게 팔아치웠다. 책에서 사건의 중심에 놓여 있는 금융 상품의 이름인 블루 다이아몬드와 유사한 이름인 다이아몬드 펀드가 이 TRS 상품 중 SK 증권 등이 라부안에 설립한 역외 펀드의 이름이다. 이 TRS의 상품 구조는 책에서 설명한 블루 다이아몬드의 구조와 거의 유사하다. 다른 점은 바트화의 선물 매입 비율이 8배가 아닌 5배였다는 점 정도일 뿐, 애초에 바트화와 인도네시아 채권을 많이 갖고 있던 JP 모건이 동남아시아 경제가 불안해질 것을 예상하고 펀드에 불안 요인을 떠넘겼으리라고 추측되는 부분은 완전히 동일하다.

일견 결점이 없어보이는 이 펀드의 약점은 태국이 통화 바스켓 방식을 포기할 경우 엔화 헤지가 무의미해질 수 있다는 점인데, 실제로 조지 소로스의 퀀텀 펀드 등 헤지 펀드들의 공매도로 인해 바트화가 평가 절하되자(펀드 계약시 25.884바트/달러->7월 평가 절하 이후 44.95바트/달러로 73.6% 평가 절하), 5배의 차입 비율로 인해서 손해 역시 5배로 늘어나면서 투자금 3400만 달러의 다섯배가 넘는 1억 8900만 달러의 손실을 입었다. (이로 인해 SK 주식회사의 외국인 지분 비율이 매우 높아졌다) 이같은 과정에서 JP 모건이 손해를 보긴 커녕 엄청난 이득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펀드가 JP 모건으로부터 5300만 달러를 차입한 조건 때문이다.

[만기상환금액] = [원금 5300만 달러] * (1 - 0.03 - (A + B))
A = max{0, ([만기엔환율] - [초기엔환율]) / [만기엔환율]};
B = min{1, 5 * ([초기바트환율] - [만기바트환율]) / [만기바트환율]}
엔화 가치가 하락하면 ([만기엔환율] > [초기엔환율]) A값이 커지므로 펀드가 이익을 보게 되고, 엔화 가치가 상승하면 max{0} 조건에 의해서 펀드에는 손실이 생기지 않는다. B 조건에 의하면 바트화 가치가 하락하면 ([만기바트환율] > [초기바트환율]) 펀드가 손해를 보게 되지만, 바트화 가치가 상승할 경우 min{1} 캡으로 인해 펀드의 이득(즉, JP 모건의 손실)은 한계가 지어져있다. 결과적으로 이 조건은 펀드가 엔화를 선물 매도하고, 바트화를 선물 매입한 것과 비슷한 효과를 갖게 된다.

실질적으로 엔화보다는 바트화가 위험하리라고 판단하는 것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조건을 받아 들인 것은 환율 변동이 없을 때 차입금에 대한 이자가 -3%로, 오히려 펀드가 차입금에 대한 투자 수수료를 받는다는 파격적인 조건인데다 바트화의 통화 바스켓 시스템에 대한 신뢰, 그 외 국내 투자 업체가 해외 투자에 경험이 없던 때이기 때문에 선진 금융 기법을 무비판적으로 신뢰했기 때문으로 추정하고 있다. 바트화/엔화 환율 변동에 따른 다이아몬드 펀드와 JP 모건의 손익 구조는 다음과 같다.

엔/바트 동반 상승 : 다이아몬드 펀드 약간 이익
엔 상승/바트 하락 : JP 모건 크게 유리
엔 하락/바트 상승 : 다이아몬드 펀드 크게 유리
엔 하락/바트 하락 : ?
소설에서 주장한 대로 헤지 펀드 세력과 JP 모건이 담합하여 바트화를 무너뜨리면서 한국에 대한 금융 공격을 시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1. JP 모건이 이미 바트화와 인도네시아 채권을 많이 갖고 있던 점, 2. JP 모건 측의 바트화에 대한 조건이 유리한 점, 3. 인도네시아 채권 투자에 대한 헤지가 전혀 없던 점(20.15%의 금리는 루피화로 받는 것이기 때문에 루피화가 가치 하락하면 펀드는 큰 손해를 보게 된다)으로 미루어볼 때 JP 모건이 의도적으로 한국 투자 회사에 손실을 떠넘긴 것은 명확한 것처럼 보인다. 결과적으로 바트화가 변동 환율제로 전환하면서 73.6% 평가 절하되면서 펀드가 JP 모건에 상환한 차입금이 약 1억 1천만 달러, 바트화 평가 절하로 인한 동남아시아 경제 위기로 인해 루피화가 2,369루피/달러에서 7,650루피/달러로 평가 절하되면서 인도네시아 채권 투자에서 7,590만 달러의 어마어마한 손실을 입으며 한국 경제에도 큰 타격을 입혔다.

97년에 외환 위기의 배후에 이런 사건이 있었다는 점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 생각하면 속 상하는 노릇이다. 더더군다나 선진 금융 기법의 탈을 쓴 사기에 가까운 거래 내역은 머리 좋고 잘 사는 놈들이 후진국에 중앙 은행을 요구하고 금융 자유화를 요구하는 이유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것 같아 더더욱 입맛이 쓰다. 소설 자체는 부실했지만 애써 찾아보지 않으면 의외로 접하기 힘든 한국 근현대 경제사의 단면과 나라 여럿을 쥐고 흔드는 신자유주의 경제의 무서움에 대해서 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된 것 같다. 시계를 조금 돌려서 좀 더 현재에 가까운 문제를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 좋겠다.

참고 자료
SK는 어떻게 JP 모건에게 농락당했나
이정환닷컴!
Diamond Fund 사건
김진호 교수의 금융 이야기
다이아몬드 펀드의 파생 상품 거래 손실 사례 분석 연구
출처 불명
세계 환율전쟁 왜 일어났나
한국일보
[경제 이야기] 조지 소로스와 아시아의 외환위기
KAIST TIMES
by 매운맛나리 | 2005/08/13 21:34 | 웰빙 : 책 | 트랙백 | 핑백(1) | 덧글(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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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플라피나 at 2005/08/17 05:05
리스크를 정말 제대로 떠넘겼군요 ;
바스켓 시스템이 무너지면서 헷지가 파기되는 최악의 상황이 일어날 줄은 국내의 전문가도 몰랐을 것이 분명합니다. 더불어 한국 정부 역시 이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보복할 생각보다는, 쉬쉬하며 가리기에 급급했을 것이 눈에 훤합니다.

어려운 소설 내용을 알기 쉽게 잘 정리해주셨네요.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을 저도 지금에서야 알았습니다. 그야말로 '경제 저격수'에 버금가는 내용들이로군요..
밑의 링크들도 좋은 정보를 많이 담고 있네요. 잘 읽었습니다.
Commented by 플라피나 at 2005/08/17 05:12
호호 이건 여담이지만
이정환닷컴!의 해당 링크에 걸린 트랙백들이 어떻게 된게 죄다 갬블링 회사 ㄱ-;
스팸발송용 트랙백봇이 바로 이런거군요.
Commented by 쌀밥 at 2005/08/18 00:03
매번 놀라는 거지면. 도대채 책을 읽을 시간이 어떻게 나십니까?
혹시 책을 사서 보시나요? 아니면 서점에서 보시나요? 읽는 속도가 빠르신가요? 주변에 누가 책방을 하나요?;;
Commented by 매운맛나리 at 2005/08/18 02:23
플라피나 / 으흐흐 재밌게 읽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중국 위안화 절상이나 환율 시스템에 대해서 살펴 볼 생각입니다.
이정환 기자님도 스팸봇때문에 고생 꽤나 하신 듯 =_=;
쌀밥 / 책은 주로 사서 보는 편이고...
읽는 속도가 그다지 빠르진 않습니다;
방구석 주말에 조금씩 OTL
Commented by 쌀밥 at 2005/08/18 23:25
저는 방구석에 있으면 동영상 보느라 시간이 정신 없이 가버린답니다;;;
예전엔 에니메이션 보느라 그랬는데, 이게 중독 중세가 나타나서 끊었습니다;
그리고 보기 시작한 것은 미국 드라마... 영어 공부삼아 보고 있는데....
아무튼 (보통 사람들 TV 보듯이) 동영상을 너무 많이 봐서 책읽을 시간이 안나는거 같아요.... 부럽습니다;; 저도 책을 좀 봐야하는데 ㅜ.ㅜ
Commented by 쌀밥 at 2005/08/18 23:26
그리고 전에 말씀 드린것 같은데, http://www.marxism.or.kr/ 이것이 이번주에 있답니다. 저는 토/일 에 들을려고 하고 있는데, 혹시 시간 되시면 같이가보지 않으시겠습니까??
Commented by 매운맛나리 at 2005/08/20 18:44
쌀밥 / 억 이제야 봤네요. 패치 후 후유증으로 지금 일어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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